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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프랑스혁명을 오랫동안 레 미제라블과 나폴레옹, 딱 두 가지로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영화 속 굶주린 민중의 눈빛이 전부였는데, 실제로 혁명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이건 단순한 반란이 아니었습니다. 부패한 구체제가 무너지고, 공포정치가 피를 부르고, 결국 한 군인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독재를 완성하는 이 기막힌 나선형 구조가 지금 시대에도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앙시앵 레짐: 부러질 수밖에 없던 나무

제가 레 미제라블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빵 한 조각 때문에 19년을 감옥에서 보내는 장발장의 이야기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혁명 직전 프랑스의 실제 기록을 들여다보니, 그 장면이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사회를 지배하던 체제를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즉 구체제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앙시앵 레짐이란 성직자·귀족·평민으로 나뉜 봉건적 신분 질서를 의미하는데,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한 성직자와 귀족이 면세 특권을 누리며 국가 토지의 30%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98%의 평민이 세금을 전부 짊어진 구조였으니, 시스템 자체가 폭발을 예약해 둔 셈이었습니다.

재정 파탄은 결정적인 불씨였습니다. 루이 16세는 미국 독립 전쟁에 대규모 자금과 함대를 쏟아부어 영국을 견제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국고는 완전히 바닥났습니다. 국가 예산의 절반이 채무 이자를 갚는 데 쓰였고, 귀족들은 끝까지 세금 납부를 거부했습니다. 여기에 1788년 유례없는 기상이변까지 겹쳐 밀 수확이 급감하고 빵값이 두세 배로 뛰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소득의 80%를 빵 한 덩어리에 써야 했습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당시 부르주아 계층의 분노였습니다. 의사, 변호사, 상인처럼 세금을 내며 사회를 굴리던 이들이 평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치 참여와 고위직에서 철저히 배제되었습니다.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의 사회계약론, 즉 "주권은 왕이 아닌 국민 전체에 있다"는 개념이 이들의 각성에 불을 질렀습니다. 사회계약론이란 국가 권력의 정당성이 국민의 동의에서 비롯된다는 정치 철학으로, 신권설에 익숙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지적 혁명이었습니다(출처: Encyclopædia Britannica).

나무가 뻣뻣할수록 부러지기 쉽다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 왕정이 조금만 유연하게 대응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제 생각에는 조금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특권층의 기득권 수호와 민중의 생존권이 맞부딪히는 순간, 그 결말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 제1신분(성직자, 약 10만 명): 토지 10% 보유, 세금 면제
  • 제2신분(귀족, 약 40만 명): 토지 20% 보유, 군·정부 고위직 독점, 세금 면제
  • 제3신분(평민, 인구 98%): 모든 세금 부담, 정치 참여 차단
  • 국가 예산 절반이 채무 이자 상환에 투입될 만큼 심각한 재정 위기
요약: 면세 특권을 독점한 2%의 지배층과 모든 부담을 짊어진 98% 민중의 구조적 모순이 재정 파탄과 기근을 만나 혁명의 뇌관이 되었습니다.

 

공포정치: 혁명이 혁명을 집어삼키다

바스티유 함락, 테니스 코트의 서약, 베르사유 행진… 혁명 초기의 장면들은 제가 직접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어떤 드라마보다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루이 16세가 한밤중 리앙쿠르 공작에게 "폭동인가?"라고 물었을 때, 공작이 "아닙니다, 폐하. 혁명입니다"라고 답한 장면은 역사의 변곡점이 이렇게 짧은 대화로 요약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울림을 줬습니다.

그런데 혁명이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저는 솔직히 이 부분이 예상 밖이었습니다. 왕의 목을 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고, 9개월 뒤에는 마리 앙투아네트도 같은 운명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진짜 광기는 그다음에 시작됐습니다.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장악한 공안위원회는 '혐의자 취급법'을 도입했습니다. 여기서 혐의자 취급법이란 물증 없이 심증과 밀고만으로 반역 혐의자를 체포·처형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누군가 이웃을 찍으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이웃이 이웃을, 하인이 주인을 고발하는 공포가 일상이 된 시기, 그 한 달 반 동안에만 파리에서 1,300명 이상이 처형되었습니다(출처: History.com).

로베스피에르는 "공포 없는 미덕은 무기력하다"며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했습니다. 그는 바스티유 습격의 영웅이었던 절친한 동지 당통마저 단두대로 보냈습니다. 당통은 처형 직전 "내 머리를 군중에게 높이 들어 보여라, 꽤 볼 만할 테니"라는 말을 남겼고, 로베스피에르도 곧 자신을 따를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은 정확히 석 달 만에 적중했습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가장 씁쓸하게 느낀 건, 로베스피에르 본인도 처음에는 순수한 이상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완벽한 도덕 공화국을 꿈꾸다 결국 그 순수주의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습니다. 혁명의 이름으로 혁명을 배신한 것입니다. 테르미도르 반동, 즉 공포정치에 위협을 느낀 의원들의 반격으로 1794년 7월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자 파리 광장에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여기서 테르미도르 반동이란 혁명력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에 일어난 반(反)로베스피에르 쿠데타를 가리키는 역사 용어입니다.

요약: 자유와 평등을 외쳤던 혁명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로 스스로를 집어삼켰고, 결국 그 광기는 자기 파괴로 끝났습니다.

 

나폴레옹: 혼란이 불러낸 영웅, 그 역설

로베스피에르 이후 들어선 총재 정부는 부패하고 무능했습니다. 투기꾼들이 배를 불리는 동안 민중은 여전히 굶주렸고, 가치 없는 지폐 남발로 초인플레이션이 덮쳤습니다. 10년 가까이 이어진 피의 혁명과 이념 투쟁에 지칠 대로 지친 프랑스 국민들은 무질서를 단번에 정리해 줄 강력한 힘을 원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결국 자유보다 안정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 자리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등장했습니다. 코르시카 출신의 가난한 포병 장교였던 그는 1795년 파리 왕당파 반란을 포도탄 전술로 단 하루 만에 진압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여기서 포도탄(Grapeshot)이란 작은 쇳덩이를 여러 개 묶어 대포로 발사하는 산탄의 일종으로, 밀집한 군중을 향해 쏘면 순식간에 무력화할 수 있는 냉혹한 무기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냉혹함을 주저 없이 썼고, 그 결단이 그를 파리의 구원자로 만들었습니다.

이탈리아 원정에서 번개 같은 기동력으로 오스트리아 대군을 연파한 뒤, 그는 막대한 배상금과 전리품을 텅 빈 파리 국고로 송금했습니다. 무능한 정치인들이 끝없이 말싸움을 벌이는 동안 혼자 승리와 재물을 가져다 준 군인. 대중의 마음이 어디로 향할지는 이미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혁명은 끝났습니다"라고 선언하며 제1통령에 올랐습니다. 10년 전 왕의 독재에 맞서 목숨을 걸었던 민중이, 이번에는 투표라는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스스로 한 군인에게 전권을 몰아주는 역설을 선택한 것입니다. 제가 이 장면을 읽었을 때 가장 묘했습니다. 틀린 선택인지 옳은 선택인지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려웠거든요.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을 누빈 것은 단순한 정복이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 법전, 즉 봉건적 신분제를 철폐하고 법 앞의 평등을 성문화한 이 법전은 군대의 배낭 속에 담겨 대륙 전역에 퍼졌습니다. 워털루에서 패배하고 쓸쓸히 유배되었지만, 그가 심은 혁명의 씨앗은 19세기를 거쳐 현대 민주주의의 뼈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프랑스 국기에 새겨진 삼색기도 그 혁명의 상징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위기의 시대에 영웅은 등장하는 법입니다. 로베스피에르라는 악당이 없었다면, 나폴레옹이라는 구원자의 자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의 혼란 속에서 다음 영웅은 누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저는 그게 진심으로 궁금해집니다.

요약: 혁명 후 혼란이 만들어낸 공백을 나폴레옹이 채웠고, 민중은 스스로 투표로 독재를 선택하는 역설 속에서 현대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프랑스혁명은 왜 일어났나요?

A. 앙시앵 레짐이라 불리는 구체제의 신분적 불평등, 루이 16세 시대의 심각한 재정 파탄, 그리고 1788년 기상이변으로 인한 극심한 식량난이 동시에 겹치면서 터졌습니다. 거기에 계몽주의 사상이 부르주아 계층의 권리의식에 불을 붙이면서 혁명의 조건이 완성되었습니다. 한 가지 원인이 아니라 구조적 모순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결과였습니다.

 

Q. 로베스피에르는 왜 공포정치를 했나요?

A. 로베스피에르는 루소의 사상을 바탕으로 순수한 도덕 공화국을 만들려 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군의 압박이, 대내적으로는 반란과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는 극한 상황에서 그는 공화국에 해가 되는 모든 존재를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로 공포정치를 정당화했습니다. 순수주의가 결국 광기로 변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Q. 나폴레옹은 혁명의 완성인가요, 배신인가요?

A.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뉘는 주제입니다. 나폴레옹 법전을 통해 법 앞의 평등과 봉건제 폐지를 유럽 전역에 퍼뜨렸다는 점에서 혁명의 완성이라는 시각도 있고, 민주적 의회를 무력으로 해산하고 황제에 오른 점에서 혁명의 배신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는 그 둘이 모순적으로 공존한다는 점이 오히려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Q. 프랑스 삼색기가 혁명과 무슨 관계인가요?

A. 프랑스 삼색기의 파랑·하양·빨강은 프랑스혁명 당시 자유·평등·박애를 상징하는 혁명의 색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혁명 이후 지금까지 국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프랑스 국민들에게 이 혁명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닌 정체성의 근간임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결론

프랑스혁명의 전체 흐름을 따라가면서 제가 느낀 건 딱 하나입니다. 기득권이 유연함을 잃는 순간, 그 사회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민들의 삶을 외면한 채 특권만 붙들고 있던 앙시앵 레짐이 그랬고, 순수함에 집착하다 동지까지 처형한 로베스피에르가 그랬습니다.

역사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프랑스혁명이 뿌린 자유·평등·박애의 가치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민주주의의 뼈대입니다. 이 혁명의 기록을 읽으면서 한 번쯤 지금 우리 사회의 구조는 어떤가, 하고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게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참고: https://blog.naver.com/cscg6472/224347611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