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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탈아론, 황해해전, 시모노세키 조약)

historypahk 2026. 8. 17. 04:17

목차


    강한 나라가 항상 전쟁에서 이기는 건 아니라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1894년 당시 세계 최강 해군을 보유했다는 청나라가 신흥국 일본에게 완패했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이 전쟁 결과를 처음 접했을 때 꽤 오래 멍했던 기억이 납니다. 병력도, 함선 덩치도 청나라가 압도적이었는데 말입니다. 오늘은 그 의문점에서 출발해서 청일전쟁 전체 흐름을 다시 짚어봤습니다.



    탈아론, 청일전쟁 전에 이미 마인드셋이 달랐다

    청일전쟁을 이해하려면 사실 전쟁보다 훨씬 앞선 18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바로 탈아론(脫亞論)이 등장한 시점입니다. 여기서 탈아론이란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화된 근대 국가로 발전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일본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처음 제기한 이론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아시아가 아니라 서양 편"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구권 만 엔권 지폐에 실렸던 인물이기도 한데, 저는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만 엔권을 볼 때마다 묘하게 불편했습니다. 그는 조선의 급진 개화파 김옥균 등을 지원했지만 1884년 갑신정변이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끝나자 "더 이상 조선에는 희망이 없다"고 규탄하며 돌아섭니다. 그리고 조선과 중국을 가리켜 악우(惡友), 즉 나쁜 친구라고 표현하죠.

    탈아론과 비슷한 맥락으로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이라는 개념도 있습니다. 탈아입구론이란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 즉 서구 열강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탈아론을 한층 더 강하게 밀어붙인 사상입니다. 이 두 사상이 이후 대동아공영권으로 변질되는 흐름을 보면,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일본은 1874년 대만 정벌을 시작으로 1875년 운요호 사건, 1876년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연달아 밀어붙이며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청사진을 하나씩 실행해 나갔습니다. 여기서 조일수호조규란 일본이 조선과 강제로 맺은 불평등 조약으로, 조선을 일본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발판이 된 조약입니다. 이처럼 전쟁이 터지기 20년 전부터 일본은 이미 계획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 탈아론(1885): 후쿠자와 유키치, "아시아 구습에서 벗어나 서구화해야 한다"
    • 탈아입구론: 유럽 열강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보다 강경한 사상
    • 대동아공영권: 탈아 사상이 변질·팽창되어 일본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자리 잡음
    • 운요호 사건(1875) → 강화도 조약(1876) → 류큐 병합(1879): 순차적이고 계획적인 팽창
    요약: 탈아론에서 시작된 일본의 서구화 의지는 제국주의 팽창의 사상적 뿌리였으며, 청일전쟁은 그 계획의 연장선에서 터진 전쟁이었다.

     

    황해해전, 거함보다 빠른 포가 이겼다

    1894년 7월 25일, 일본 군함 세 척이 아산 앞바다 풍도에 매복해 있다가 청나라 군함을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합니다. 풍도해전입니다. 이 첫 해전에서 청나라는 순양함 한 척과 상선 한 척을 잃고 사상자만 1,000여 명이 넘었지만, 일본 측 피해는 전무했습니다. 이후 성환 육상 전투, 평양 전투까지 일본은 연전연승을 이어갑니다. 평양 전투에서 청군 전사자가 2,000여 명에 달했던 반면 일본군 전사자는 약 180명에 그쳤으니, 전투력 차이가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9월 17일, 전쟁의 승패를 실질적으로 결정지은 황해해전(黃海海戰)이 벌어집니다. 황해해전이란 압록강 인근 황해에서 청나라의 북양함대(北洋艦隊)와 일본 연합함대가 맞붙은 해전으로, 아시아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철갑 증기선 함대 간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당시 현장을 지켜보던 서양 열강들도 놀랐다고 전해질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죠.

    북양함대는 7,000톤급 전함 두 척을 포함해 군함 14척을 내보냈고, 일본 연합함대는 12척으로 맞섰습니다. 수치만 보면 청나라가 유리해 보이지만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일본은 거함(巨艦) 위주로 덩치를 키운 북양함대에 대항해 기동성과 속사포(速射砲)를 앞세웠습니다. 여기서 속사포란 단시간에 연속으로 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포로, 느리게 이동하는 대형 함선에 치명적인 무기였습니다. 약 4시간의 포격전 끝에 북양함대는 다섯 척이 격침된 채 퇴각했고, 일본 연합함대는 단 한 척도 잃지 않았습니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황해 제해권을 완전히 손에 넣은 일본 육군은 곧바로 청의 요동반도로 진입해 최대 요충지인 뤼순항(旅順港)을 하루 만에 점령합니다. 저는 이 대목이 항상 마음에 걸립니다. 뤼순 점령 이후 일본군은 약 2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이 사실은 지금도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라 그렇습니다. 전쟁의 승리 뒤에 감춰진 이 장면은 빠뜨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요약: 황해해전에서 기동성과 속사포를 앞세운 일본 연합함대가 아시아 최강 북양함대를 격파하며 전쟁의 판세를 완전히 뒤집었다.

     

    시모노세키 조약, 조선은 독립이 아니라 손바뀜이었다

    황해해전 승리 이후 이듬해인 1895년 초 일본은 산둥반도 웨이하이마저 함락시키고 대만까지 손에 넣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당시 "청은 최강국의 자리를 내려놓았고 그 자리를 일본이 차지했다"고 보도했습니다(출처: The New York Times). 베이징마저 위태롭다는 판단에 청나라 최고 권력가 이홍장(李鴻章)이 직접 일본 시모노세키로 찾아와 협상 테이블에 앉습니다.

    1895년 4월,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이에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은 청일전쟁의 최종 청산서였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이란 청나라가 일본에 배상금 지급, 영토 할양, 조선의 독립 인정 등을 약속한 강화 조약으로, 동아시아 패권 구도를 완전히 재편한 역사적 분기점이었습니다.

    이 조약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무려 2억 냥의 배상금을 받아냈는데, 이는 당시 청나라 3년 치, 일본 4년 치 세출 예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리고 요동반도와 대만섬을 영토로 할양받았습니다. 돈도 땅도 가져간 셈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청나라는 "조선은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하고 조선에서의 종주권과 조공 관계를 포기한다"는 조항에 서명합니다. 독립이라는 단어만 보면 조선에 유리한 것 같지만, 저는 이게 사실상 조선을 청의 손에서 일본의 손으로 넘겨주는 절차였다고 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적지 않은데, 실제로 이 조약 이후 조선은 곧바로 일본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니까요. 청일전쟁의 진짜 전리품은 결국 조선이었던 것입니다.

    요약: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은 천문학적 배상금과 영토를 얻었고, "조선 독립 인정" 조항은 실질적으로 조선을 일본의 영향권으로 넘기는 절차였다.

     

    자주 묻는 질문

    Q. 청일전쟁은 왜 조선 땅에서 벌어진 건가요?

    A. 청나라와 일본이 모두 조선의 종주권을 두고 경쟁하던 상황에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두 나라가 동시에 군대를 파견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동학농민혁명이란 반외세·반봉건을 기치로 조선 농민이 봉기한 운동으로, 의도치 않게 외세 개입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농민군이 전주 화약을 맺고 해산한 뒤에도 양국 군대가 철수하지 않으면서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Q. 청나라가 진 이유가 단순히 전력 차이 때문인가요?

    A. 단순히 일본이 강해서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청나라 스스로 자초한 패배라는 측면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군비의 상당 부분이 황실 사치로 새어 나갔고, 지휘관들은 전쟁 책임을 회피하며 도주하기에 바빴습니다. 조직이 무너진 군대가 아무리 거대한 함선을 보유해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청일전쟁이 보여줬다고 봅니다.

     

    Q.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요동반도는 결국 어떻게 됐나요?

    A. 삼국간섭(三國干涉)이라는 변수가 등장했습니다. 삼국간섭이란 러시아·프랑스·독일이 연합해 일본에 요동반도 반환을 압박한 외교적 개입을 말합니다. 일본은 결국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돌려줬고, 이 사건이 이후 러일전쟁의 씨앗이 됩니다. 승리 이후에도 열강의 견제가 이어졌다는 점에서, 청일전쟁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충돌의 시작이었습니다.

     

    Q. 동학농민혁명 때 조선 군대도 청나라와 일본 편으로 나뉘어 싸웠다는 게 사실인가요?

    A. 사실입니다. 평양 전투에서 중앙군인 장위영은 일본군 편에서 싸웠고, 평양 지방군인 기영은 청나라 편에 섰습니다. 조선 땅에서 조선군끼리 총구를 겨눈 것입니다. 제가 이 대목을 처음 제대로 알았을 때 가장 착잡했는데, 두 외세의 대리전이 얼마나 조선을 깊숙이 갈라놓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고등학교 때 청일전쟁 발표를 준비하면서 "그래도 청나라가 이기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던 게 기억납니다. 결과를 확인하고 나서 꽤 오래 의아했던 것도요. 이번에 다시 공부하면서 그 의문이 비로소 해소됐는데, 결국 전쟁의 승패는 함선의 크기나 병력 수가 아니라 조직의 결속력과 전쟁에 임하는 의지가 결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청나라가 군비를 제대로 지켰더라면, 조금만 더 내부 부패를 잡았더라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그 아쉬움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고스란히 조선과 연결됩니다. 이 전쟁의 결과가 달랐다면 지금의 한국이 걸어온 길도 분명 달라졌을 테니까요.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지만,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닿아있다는 사실이 역사 공부를 멈출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삼국간섭 이후 일본의 팽창을 막으려 했던 러시아와의 한판, 러일전쟁으로 이어서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gsMtt4ZdEw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