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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미국과의 전쟁 한 번으로 스페인은 수백 년간 쌓아온 해외 식민지를 전부 잃었습니다. 이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스페인을 그저 축구 잘 하는 나라, 남미 대륙을 손에 쥐었던 강대국 정도로만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2026년 월드컵 우승으로 다시 주목받는 스페인이 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두 전쟁에 공식적으로 참전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평화주의'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생각이 꽤 달라집니다.
제국의 몰락 — 강대국이라는 착각이 깨진 순간
제가 어릴 적 가족과 함께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 바르셀로나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에 섰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 압도적인 규모를 올려다보면서 '이 나라는 정말 강대국이었구나'라고 속으로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 인상이 강했던 만큼, 스페인이 1차 세계대전 당시 사실상 군사력이 바닥난 나라였다는 사실은 저에게 꽤 큰 충격이었습니다.
1898년 미서전쟁(Spanish-American War), 즉 스페인과 미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스페인은 완패했습니다. 여기서 미서전쟁이란 쿠바 독립 문제와 미국 선박 폭발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스페인에 선전포고하며 시작된 전쟁을 말합니다. 결과는 스페인의 구식 함대가 미국 해군에 산산이 부서지는 것으로 끝났고, 파리 조약을 통해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까지 남아 있던 해외 영토를 모두 내줘야 했습니다(출처: 미국 의회도서관).
이 패배 이후 등장한 것이 소위 '98년 세대(Generación del 98)'입니다. 여기서 98년 세대란 미서전쟁 패배의 충격 속에서 스페인의 자기 쇄신을 촉구했던 지식인·작가 세대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무모한 해외 팽창 대신 국내 내실을 다져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자성의 목소리였지만, 뒤집어 보면 그만큼 스페인이 처한 현실이 처참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0세기 초 스페인 내부는 카탈루냐·바스크 지역의 분리 민족주의,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계열 무장 노동운동, 그리고 모로코 북부 리프 지역 식민지 반란이 동시다발로 터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군대는 실전 경험 없는 장교들로 가득 찼고, 무기와 물자는 국내 치안과 리프의 게릴라전을 치르느라 이미 바닥나 있었습니다. 1914년 사라예보의 총성이 제1차 세계대전의 막을 올렸을 때, 스페인이 즉각 중립을 선언한 건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습니다.
- 1898년 미서전쟁 패배로 쿠바·푸에르토리코·필리핀 등 모든 해외 영토 상실
- 98년 세대의 등장 — 제국주의 팽창 비판, 국내 내실 강화 주창
- 카탈루냐·바스크 분리주의, 무장 노동운동, 모로코 리프 반란 동시 진행
- 1차 세계대전 개전 시점에 스페인 군사력은 사실상 대외 투사 불가 상태
내전의 상처 — 전쟁보다 잔혹했던 스페인 내부의 3년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스페인은 교전국 양측 모두에 원자재, 철강, 농산물을 팔며 역사상 최대의 경제 호황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부분을 접하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럼 잘 된 거 아닌가?'였습니다. 그런데 호황의 과실은 자본가와 산업가 계층에만 집중됐고, 생산된 물자가 비싼 값을 받는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국내 물가는 폭등했습니다. 노동자와 서민의 구매력은 오히려 추락했고, 결국 1917년 대규모 총파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호황마저 사라지자 경제는 급격히 침체됐습니다.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정치권 대신 1923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1929년 세계 대공황(Great Depression), 즉 미국 월가 붕괴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 경제를 무너뜨린 대규모 경제 위기가 덮치며 그의 독재 정권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국왕 알폰소 13세까지 망명을 떠나면서 스페인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출처: Britannica).
공화국은 토지 재분배, 정교 분리 등 광범위한 개혁을 시도했지만, 보수 기득권·가톨릭 교회·군부는 이를 체제 위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반대로 아나키즘 계열 노동조합은 개혁이 너무 느리다며 더 급진적인 행동을 요구했습니다. 1936년 좌파 연합 인민전선(Frente Popular)이 선거에서 승리하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을 앞세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것이 스페인 내전(Spanish Civil War)의 시작이었습니다. 여기서 스페인 내전이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3년간 공화국 정부군과 프랑코의 반란군 사이에 벌어진 내부 무력 충돌을 말합니다.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프랑코 측에 최신 무기와 항공 지원을 퍼부었습니다. 이들에게 스페인은 새 전술과 무기를 실험하는 거대한 훈련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반면 영국과 프랑스는 불간섭 정책을 내세우며 공화국을 외면했습니다. 3년간의 내전이 끝난 1939년 4월, 프랑코가 승리를 선언했을 때 스페인은 인프라가 파괴되고, 농업 생산량이 바닥을 기며, 연료 한 방울 없는 잿더미 상태였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5개월 뒤 2차 세계대전이 터졌습니다. 이 상황에서 스페인이 전쟁에 뛰어드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프랑코의 줄타기 — 계산된 중립의 기술
2차 세계대전 초반, 독일이 프랑스를 단 몇 주 만에 짓밟으며 피레네 산맥 바로 북쪽까지 밀고 들어왔을 때 프랑코는 즉각 태세를 전환했습니다. 공식 외교 상태를 '엄정 중립'에서 '비교전국(Non-belligerent)'으로 슬쩍 바꾼 것입니다. 여기서 비교전국이란 군사적으로 직접 참전하지는 않지만 정치적으로는 특정 진영을 지지하는 상태를 뜻하는 외교 용어입니다. 사실상 독일·이탈리아 편을 들겠다는 신호였습니다.
히틀러는 프랑코에게 지브롤터 해협 봉쇄 등 직접 참전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코는 참전의 대가로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 할양과 막대한 식량·연료·최신 무기 제공을 요구하며 사실상 불가능한 청구서를 내밀었습니다. 훗날 히틀러가 "그 스페인 독재자와 다시 협상하느니 내 생니를 서너 개 뽑겠다"고 격분했다는 말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불가능한 조건'을 내거는 전략은 상대방을 거절하면서도 체면을 지키는 가장 고전적인 협상술인데, 프랑코는 그걸 국가 차원에서 구사한 셈입니다.
그렇다고 프랑코가 완전히 발을 뺀 것은 아니었습니다.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그는 약 5만 명 규모의 스페인 의용군을 독일 국방군 편제로 동부 전선에 파병했습니다. 이 부대는 레닌그라드 포위전 등 혹독한 전장에서 싸웠습니다. 프랑코 입장에서 이 파병은 정교한 외교적 균형추였습니다. 독일에게는 '피를 함께 흘리는 동지'라는 메시지를 주면서, 영국과 미국에게는 '우리는 공산 소련과 싸울 뿐 서방과 적대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동시에 보낸 것입니다.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이 반전에 성공하고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 상륙하며 전세가 기울자, 프랑코는 다시 계산기를 두드렸습니다. 동부 전선 의용군 철수를 명령하고 외교 상태를 다시 '엄정 중립'으로 되돌렸습니다. 국내 선전물에서 파시즘적 색채를 지우고, 다가올 냉전 시대를 겨냥해 가톨릭 국가이자 반공주의(Anti-Communism)의 최전선임을 서방에 적극 어필했습니다. 여기서 반공주의란 공산주의 체제 및 소련의 영향력 확산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을 말합니다. 이 전략 덕분에 전후 영국·프랑스의 반발로 유럽 공동체 합류는 오래 막혔지만, 미국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원만하게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스페인은 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나요?
A. 평화 의지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1898년 미서전쟁 패배 이후 해외 영토를 모두 잃고 군사력이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는 카탈루냐 분리주의, 무장 노동운동, 모로코 리프 반란이 동시에 터지고 있었고, 군대는 그 진압에 이미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대외 전쟁에 뛰어들 여력이 단 1%도 없었습니다.
Q. 스페인 내전이 2차 세계대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A. 직접적인 영향이 컸습니다.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스페인 내전을 신무기와 전격전 전술을 실전 테스트하는 장으로 활용했고, 이 경험이 2차 세계대전 초반 독일의 빠른 전선 돌파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반면 스페인 자체는 내전으로 인프라와 경제가 완전히 파괴되어 2차 대전 개전 시점에 참전 능력이 없었습니다.
Q. 프랑코는 왜 히틀러의 참전 요구를 거절했나요?
A. 현실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3년간의 내전으로 스페인 경제는 파탄 상태였고, 연료와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장기전을 버틸 수 없다는 것을 프랑코 스스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아프리카 식민지 할양과 대규모 물자 지원이라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어 사실상 참전을 거부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Q. 스페인이 2차 세계대전에서 완전히 중립이었나요?
A. 완전한 중립은 아니었습니다. 초반에는 '비교전국'을 선언하며 독일·이탈리아 편을 지지했고, 1941년에는 약 5만 명의 의용군을 독일 국방군 소속으로 동부 전선에 파병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전세가 연합국 쪽으로 기울자 1943년 의용군을 철수하고 엄정 중립으로 되돌리는 등, 프랑코는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며 외교적 생존을 도모했습니다.
결론
스페인이 두 차례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은 것은 숭고한 평화 철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1898년 미서전쟁으로 제국이 무너졌고, 1차 세계대전 기간의 경제 불평등이 내부 분열을 심화시켰으며, 스페인 내전이라는 3년간의 참혹한 자기 파괴가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참전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돕니다. 만약 1차 세계대전 호황의 과실이 노동자와 서민에게도 골고루 돌아갔더라면, 내부 분열과 정치 부패가 그만큼 심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 스페인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가능성도 올라갔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당시 스페인 정부의 부패와 불평등이 역설적으로 스페인을 더 큰 전쟁의 불구덩이에서 구해낸 셈이 된 것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스페인 역사에 조금 더 관심이 생기셨다면,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체제에 대해 더 깊이 들여다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생각보다 훨씬 우리와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